일상/2019

우리는 빠르게 가야할까

Sunshine state 2019. 11. 29. 21:18

그 선배는 모두가 동경했다. 동아리방에서 그 선배가 클래식 기타 연주를 하면 작은 연주회에 온 것 같았다. 실제로 군대가기전 연주앨범도 냈다고 들었다. 아무튼 가끔 동아리방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곤 했는데 조금 과장하자면 손가락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많이 연습했을까 싶기도 하고 역시 고수의 손은 정말 빠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은연중에 빠르게 연주하는게 제일 고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동아리에 가입했기에 합주를 준비하고 연습했었다. 혼자서 연습할때 나도 모르게 연주 속도가 빨라졌다. 아니 합주때 역시 그랬다. 내가 잘해서는 아니었다. 다른 동아리 선배(편의상 X라고 불러야지) 다들 점점 빨라지니까 메트로놈을 켜고 연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연주속도는 왜 빨라질까? 나도 그 선배 처럼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아니면 나도 모르게 흥겨워져서? 마음이 급해져서? 사실 나는 세가지 모두가 맞는 것 같다.

X선배가 말하길 빠르게 하는것 보다 사실은 천천히, 정박에 맞추는게 더 어려운거라고 했다. 빠르게 연주하면 실수는 쉽게 묻힌다. 빠른 리듬속에 있다보면 조금 박자가 틀려도 분간하기 어렵고 음도 금방 없어져 버린다. 정박에 맞춰서 연주를 하다보면 확실히 틀린 박자들이 쉽게 들려오고, 예쁘지 않은 음도 잘 들려와서 거슬리기도 한다. 나는 이 이유가 큰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내가 내 실수를 가리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 속도에 맞추어 빠르게 가려고 했다.

우리는 빠르게 가야할까? 아니 나는 빠르게 가야할까?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니 내가 너무 뒤쳐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만의 속도가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자, 곧 좋은 연구주제를 잡을 수 있겠지하고 생각했지만 항상 불안하고 동기들과 비교하게 됐다. 모두가 빠르게 달려가는것만 같고 나만 따라잡지 못하는게 아닐까.

며칠전 연구실 박사과정 선배의 디펜스를 들어가서 발표하는걸 들었다. 연구 성과도 좋고 잘하는 선배지만 준비가 덜됐을때, 말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는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발표때도 말이 빨랐었는데 만약에 있을 수 있는 실수를 가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발표하는 내 모습도 오버랩됐다. 준비가 덜 될 수록 교수님 얼굴 보기가 어렵고 말이 빨라지던 내 모습. 그러다가 X선배의 말이 생각이 났다. 빠르게 연주하는것 보다 천천히 연주하는게 더 어렵다고. 사실 지금 불안한 마음도 크고 힘들기도 한데 잘하고 있는거라 믿어야지. 나의 속도를 지키고 있는거라고.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서 내공이 되는거고 나는 탄탄한 기반을 쌓고 있는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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