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7

171211

Sunshine state 2017. 12. 12. 13:09

 꽤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우선은 오늘은 인턴십 첫 날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회사까지는 지하철로 약 10분, 걸어서는 45분. 지금까지 왠만한 거리는 걸어다녀서 아직은 엄청 춥지는 않으니까 걸어가볼까 싶어서 아침 일찍 알람을 맞춰놨다. 11시 출근이지만 8시쯤 알람을 맞춰두었는데 실제로 일어난건 9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구글지도로 길을 찾아봤을땐 지금 나가면 30분이 남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첫날이니까 지각하는것 보다는 일찍 가는게 좋겠지, 출근시간대는 아무래도 가늠하기 힘드니까 일찍가면 스타벅스에 가야지, 생각했다. 사실 오늘이 크리스마스 프라푸치노를 먹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고, 아침도 요거트 조금 먹은게 전부여서 일찍가서 크리스마스 프라푸치노 먹으면 되겠다!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포트 오쏘리티 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버스에 내리니 직원분이 9번가는 이쪽입니다 하고 계속 안내를 했다. 평소에는 아무도 길을 알려주지 않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이미 걸어가기는 늦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갈 계획이었는데 8번가로 가는 길이 막혀있었다. 물론 지하철도 탈 수 없었고 9번가쪽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터미널 유리문에 기대어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얼핏 들은 방송으로는 지하철에 사고가 났으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열차 탈선 사고같은게 난걸까? 생각하면서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회사는 터미널에서 업타운 방면에 있었기 때문에 우선은 위쪽으로 걸어갔다. 지하철을 타려면 어찌됐던 8번가쪽으로 가야했는데 바리게이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걸어갔다. 사방에 바리게이트가 쳐져있고,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들이 길거리에 가득했다. 도로는 모두 통제되어 있고 소방차와 경찰차만이 도로위에 있었다. 업타운 쪽으로 걷다가 동쪽으로 걸었다. 애비뉴에 비하면 스트리트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편인데 사람이 가득했다. 다시 지도검색을 해보니 타임스퀘어 쪽에서 지하철을 타라고 나와서 타임스퀘어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른 아침에도 관광객도, 인형탈을 쓴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소랑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타임스퀘어 지하철 역에 도착했지만 통제되어 있는건 똑같았다. 지하철 타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물어봤더니 브라이언트 파크까지 가라고.. 어쩔수 없지 갈 수 밖에..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검색을 해봤다. 제일 처음 본 뉴스기사는 타임스퀘어 부근에서 폭탄사고가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이거 포트 오쏘리티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순간 너무 무서웠다. 포트 오쏘리티 A, C, E선에서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우선 내가 매일 타고다니는 버스의 종착역이 포트 오쏘리티 버스 터미널이고 (매일 가는 곳이다.) 회사로 가려면 A, C, E 선을 타야했기 때문. 많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너무 무서웠다. 뉴스 기사를 읽어보니 '월요일 출근길'이 타겟이었다는데 어쩌면 나도 그 희생자일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폭탄 테러가 오작동으로 실패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테러가 성공했다면, 테러범이 시간을 조금만 늦췄다면, 지하철 안이 아니라 터미널 내였다면, 내가 오늘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미국에 오기전에 내 총맞아서 죽으면 어떡하냐고 흘러가는 소리로 징징거렸는데 이건 정말 현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11월 초에 미국에 입국했는데 그 때도 입국심사에 대한 걱정이 엄청 컸다. 10월 말쯤에 입국을 엄격하게 하겠다는 얘기도 있었고, 실제로 10월 31일 뉴욕에서 트럭 테러도 일어났다. 난 진짜 그렇게 입국심사를 오래 해본게 처음이다. 체코에서 미국으로 들어갈때 오슬로에서 환승을 했는데, 그 때 항공사 직원이 줄서있는 모든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인터뷰 하듯 물어보고 여권에 이상한 딱지도 붙였다. 그리고 나는 랜덤으로 특별 체크를 받아야 한다고 막 그랬는데 랜덤 같지가 않았다. 항공사 다니는 친구가 테러범이랑 생일이 같다거나 이름이 비슷하거나 여권을 새로 발급받거나 하면 걸리기도 한다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됨. 무튼 잠재적 범죄자 취급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뉴욕에 도착해서도 비행기 내려서 입국심사 때까지 두시간 정도 기다린 것 같다. 심지어 내 앞에서 입국심사 거절된 것도 봤음. 나도 꽤 오래했던거 같다. 왜이렇게 오래있냐, 한국에서 뭐했냐, 어디사냐, 돌아갈 비행기표는 끊었냐, 전공이 뭐냐 나중에 어디 취직할 계획이냐 이런것까지.. 그리곤 생각했다 다시는 미국에 오지 말아야지.. 나이아가라 캐나다쪽 폭포에 가고 싶은데 딱히 비자에 문제는 없지만 입국할 때 생각하면 없던 문제도 생길 것만 같아서 못가고 있다. 출국날 까지 미국에만 있다가 갈판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실제 세상에 있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에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먼나라 이야기 같았던 문제들이 사실은 진짜로 일어나는 일들이었던 것이다. 어째 시기가 이렇게 맞물렸는지는 모르겠다. 테러위험때문에 입국심사를 강화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옳다 그르다 왈가왈부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죽음가까이 갔던 하루라고 생각했다.


 이건 약간 다른 얘기지만 나는 가끔 평행우주를 생각한다. 중학교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별명은 또라이였다. 직접적으로 말해본적도 없고 그냥 먼 발치에서 본 게 전부다. 별명은 또라이지만 성격이 이상한 건 아니었고 지적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던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그아이에 대해 많이 잊어버렸지만 영화 트랜스포머를 좋아했고, 평행 우주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과학영재였다. 짝사랑을 하면 으레 그렇게 되지 않나, 그 사람이 좋아하는게 궁금해지고 괜히 찾아보게 되는 것. 평행 우주가 그래서 도대체 뭔데! 싶어서 여기저기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엄청 혹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정도가 되버렸다. 과학적으로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고 이해 할 수 있을거란 생각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라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 때 조금만 상황이 달랐어도,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어도 지금 살아있지 않을까, 살아서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아니 그저 이루어 질 리 없는 나의 바람이지만 그냥 평행우주라는것이 존재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거라고 믿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한편 또 가끔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 최악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안도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해야지 라고 되뇌인다. 이렇게 해서 정말 행복해 질지 아닐지는 모르겠고 이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저 테러가 실패했고 사람들이 죽지 않았고, 나도 지금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일기를 적을 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원래는 인턴십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했는데 말이 길어져버렸다. 우선 그만두고 싶다. 오늘 내가 한일은 알파벳 모형 분류하기, 선물봉투에 비타민 담기, 햄버거 박스에 스티커 붙이기다. 알파벳 모형 분류하기 할 때만해도 즐거웠다. 음 역시 나는 손이 빠르군. 분류도 척척해내네. 이게 내 적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다음으로 수십개의 선물 봉투에 넣을 비타민을 꺼내기 위해 박스를 개봉하고 꺼내고 집어넣었다. 봉투랑 박스들 때문에 손등이 긁혀나가며 나 지금 왜 사서 고생하고 있는거지? 생각했다. 그리고 대망의 햄버거 박스에 스티커 붙이기. 스티커를 컷팅하고 햄버거 박스를 꺼내서 스티커를 붙이고 포갰다. 점심을 먹고 난 두시부터 거의 퇴근시간인 6시까지 400개의 햄버거 박스에 스티커만 붙였다. 온갖 회의가 들었다. 나 여기서 뭐하는거지? 동생이랑 전화 할 때 마다 동생은 언니는 바보라고 돈주고 일하지 말고 때려치고 한국오라고 그랬는데 동생말이 맞는 것 같았다. 역시 내 일이라서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걸까?


 이 인턴십에 대하여 큰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우선 전공과 관련한 회사에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목적 역시 실제 회사에서 일해보고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회사에 인터뷰를 보러 갔을때 우리는 점심때 다같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 이 때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게 밥먹을 때 말고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는 건줄 몰랐다. 아직 첫날이라서 그런거겠지 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이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칼질하기, 가위질하기, 풀칠하기 밖에 없어 보인다. 이것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내가 너무 부정적인 사람인걸까? 사실 엄청나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거 아닐까? 그래도 조-금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일이면 인턴십이 아니라 무급 알바 아니냐.. 아니 심지어 나는 돈내고 하는데 노동력 착취당하는 기분이었다. 학원이나 회사나 쌩 양아치임. 


 그렇다. 내가 뭔가를 배우고 있다, 이 회사에서 무언가 얻어 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괜찮았을텐데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내가 하는 것 같았다. 기계는 일하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배워가지도 않는다. 이게 첫날이라서 그런걸까? 이런 반복적인 일을 거의 네시간이나 하고 있으니 죽을거 같았다. 얻는게 있었다면 건조해진 눈이랄까.. 나는 영어로 말하기 위해 이 회사에 왔지만 사실 회사 사람들은 나한테 말을 걸어줄 의무가 없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시키고 아니면 끝이다.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해외에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이제 한달이 넘었다. 뉴욕에서 거의 두달을 지낼 건데 그 중 한달을 가위질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대화라면 그냥 길거리에서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 두고 싶다고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야지 생각했다.


 사실 이 일기는 메일을 보내기 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이 긴 기록을 끝내면 나는 메일을 보낼 수 있을까. 무조건 그만두겠다고 메일을 보내야지라고 생각하며 퇴근했다. 


 며칠전에 일기를 썼다. 기회도 초콜릿 상자 같다고. 그리고 쓰디 쓴 초콜릿을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건 나에게 어떤 초콜릿일까? 확실한건 달콤하지는 않다. 이건 그저 쓴 초콜릿일까? 쓰지만 사실은 몸에 좋은 초콜릿은 아닐까? 기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좋아보이지만 영 아닌건 걷어차버리자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이 상황이 되니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니, 미국에 와서 학원을 다니고 인턴십을 해보고 싶다고 한건 내 결정이었다. 그리고 하루안에 내 결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니까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잘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사탕발린 소리에 넘어간 어린 아이가 된 것같다. 나는 평생 잘 할 수 없는걸까? 오랜만에 큰 결심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것마저 틀린 결정이었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두려움이 크다. 아직도 나는 내가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 지, 무슨일을 해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내린 결정이 틀릴까봐, 고칠 수 없을까봐 취업을 미루고 미뤄왔다. 이제는 더이상 미룰 구석마저 없는데 멀리 와서 마음을 가다듬고 성장하고 의지를 가지고 가고 싶었는데 답답하다. 


 모두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그래 이건 무급이니까 더 하기 싫었을지도 몰라. 이 반복적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 돈을 받는 일이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물론 내가 붙인 스티커 상자들이 의미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하고 있는 일이고 보람을 느끼는 일일테니 함부로 의미없다고 말하기도 조심스럽지만 10분동안 햄버거를 먹고 쓰레기통에 버려질 박스들을 생각하면 더 기운이 빠지는건 사실이다. 어떤 일을 하게 되건 내가 의미있다고 느껴지는 일을 하고 싶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물론 내가 잘하고 좋아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면 최고 일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그러길 바랬는데 그러질 못해서 지금 이모양일지도 모르겠다. 하기 싫어도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인걸까?


 이래저래 글을 쓰다가 하기싫은걸 그만 둘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나는 하기 싫은 일을 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놀고 먹고 여행다니고 공부하고 쉬고. 하지만 어릴적 나는 할 수 없는게 너무 많았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나는 심심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싶었고, 친구들 모두 가기 싫어하는 학원도가고 독서실도 가고 싶었다. 근데 나는 학교가 끝나면 학교에 남아서 더 공부를 하던지 집에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불행했냐고 물어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면 대학생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해봐야지. 동아리도 가입하고, 학회도 들고 봉사활동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대외활동도 하고 자격증도 따고. 많은 걸 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모든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고 싶다고 생각한건 다했고 하기 싫은건 안 할 수 있었고 즐거웠다. 근데 그것들이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건 별로 없다. 그냥 누워서 쉬는게 편하다. 밖으로 나가 구경하는것도 반은 여기까지 왔는데 의무감이 나갈때도 있다. 나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하고 싶지 않은 걸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내 선택대로 살 수 있다는건 행복한 일인 것 같다. 


 하루 출근했지만 너무 그만두고 싶었는데 바로 그만두겠다고 못한건 나에 대한 실망도 있었다.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못참고 금방 그만둬버리는 걸까? 앞으로도 아무것도 끝까지 못해내면 어떡하지? 회사에 다니면 일에 적응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매일 하고싶은대로 쉬고 싶으면 쉬고 놀고 싶으면 노는데 익숙해져서 하기싫은 걸 못하게 되는건 아닐까.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끈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모르겠다. 빨리 선택하는게 좋을 것 같지만 내일 하루 더 출근해보고 담당자님께 얘기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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